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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렌하임 전투(Battle of Blenheim) - 결과 및 영향 본문

블레넘의 함락
“ 우리군은 불길을 넘어 싸웠다. 양측 모두의 군대가 죽음으로 산화하는 동안까지. ”
— 근위 제1연대 보병의 개인적인 기록.
동맹군이 루징겐에 있는 바이에른군의 방어를 다시금 공격하는 동안, 외젠 공작은 그들의 공격이 실패한데 낙담한 황제군 기병대를 격려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궤주를 막기 위해 그의 병사 두 명을 즉결처분했다. 그리고 혐오감에 넌더리 치면서 "비겁자가 되지말고 용감한 전사로써 싸워라"고 외쳤다. 외젠 공작은 프로이센과 덴마크 보병대와 함께 공격에 나섰고, 데사우어(Dessauer)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군대를 고무하기 위해 연대기를 휘둘렀다. 이때 프로이센군은 바이에른 포병대를 강습할 수 있었고, 이윽고 그들을 제압했다. 마을너머에서 스콜텐의 덴마크군은 절망적인 총검 육박전 속에서 프랑스 보병대를 격퇴하였다. 중앙이 붕괴되는 것을 보았을 때 선제후와 마르생(Marsin)은 전투가 패했다고 생각하고 탈라르의 군대의 잔여부대처럼 전장을 떠나기 시작했다.(비록 그렇지만, 탈라르의 부대보다는 궤주상태가 덜했다.) 기병대가 지친상태였기 때문에 동맹군은 마르생의 퇴각을 막지 못했고, 전장에 혼란은 가중되어갔다.
말버러 공작은 그의 주의를 도망가는 적에게 돌려, 찰스 처칠(Charles Churchill)에게 보병대의 일부를 떼어내어 블레넘을 공격하게 하였다. 오클리(Orkney)의 보병대와 헤밀턴(Hamilton)의 영국 여단, 그리고 성 바오로의 하노버군대는 밀들을 뭉개며 작은 집들을 해쳐나갔다. 프랑스군과의 사나운 육박전이 마을 중앙과 충분히 방어준비가 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교회로 가는 동안 계속되었다. 하이(Hay)와 로스(Ross)의 하마한 용기병들 역시 보내졌으나, 드 라 실베레(de la Silvière) 대령 휘하의 알토이즈, 프로방스 부대의 반격을 받았다. 벨빌레(Belville) 대령의 하노버군은 용기병대가 처한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다시 한 번 공격을 가하였다. 동맹군의 진격은 방어군과 마찬가지로 느리고 힘들었고, 그들은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회흐슈타트 박물관에 있는 디오라마 전투. 중앙의 전장으로 밀고 들어오던 탈라르의 기병 대대를 동맹군 기병대가 저지하는 블레넘 전장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했던 순간을 묘사했다.
많은 민가가 불에 탔고, 이로 인해 전장에 흐릿한 불길이 번지면서 방어측을 전장에서 내몰았다. 블레넘에서의 소음을 듣고 탈라르 원수는 말버러 공작에게 수비군이 전장으로부터 퇴각을 명령하길 제안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공작은 말했다. "탈라르 씨에게 지금 그의 처지에서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고 알려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혼이 지자 동맹군 사령관들은 빠른 결론을 원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보병대는 블레넘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싸우고 있었으나, 그들의 사령관들을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마을에 대군을 몰아넣은 클레람바(Clérambault)의 실수가 그날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자신의 전술적 실수가 중앙에서의 패배를 야기했다는 것을 깨닫자, 클레람바는 블래넘과 그 마을을 지키고 있는 27개의 보병대대를 버리고 도망갔고, 이후에 보고되기로 도망가던 와중에 다뉴브강에서 익사했다고 한다.
이제 블레넘은 3명의 영국 사령관, 커츠, 처칠, 오클리로부터 모든 곳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모든 공격을 격퇴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평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들의 결과가 무엇인지 보고 있었다. 그들의 군대는 궤주했고, 그들은 고립되어 있었다. 후방에서 공격하던 오클리경은 다른 작전을 시도했다.
“ 적과 협상하는 것이 내 머리 속으로 들어왔다. ... 그들은 이를 받아들이고 데 노빌레(de Nouville) 중장이 즉각적으로 나에게 항복해 무기를 내리고 포로가 되었다. ”
— 오클리 경의 나중의 기록
동맹군의 총포에 위협을 느껴 다른 부대도 그들의 선례를 따랐다. 그러나 21시가 될 때까지 클라람바의 빈자리를 채웠던 데 블란자(de Blanzac) 후작은 패배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를 받아들이고 10,000명의 프랑스 정예 보병부대는 그들의 무기를 땅에 내려놓고 항복했다.
이런 사건들이 진행되는 동안 말버러 공작은 말을 타고 붕괴된 적을 추적하는 것을 지휘하고 있었다. 말버러 공작은 잠시 멈추어 낡은 술집 영수증에 그의 아내 사라(Sarah)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 나는 더 자세하게 쓸 시간은 없지만,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여왕 폐하에게 나의 경의와 우리 군대가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전달해 주시오. ”
영향
프랑스군은 30,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전사 혹은 부상당했거나 실종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무적"이라는 신화가 깨졌고, 빠른 종전을 통한 평화를 얻으려는 루이 14세의 꿈은 좌절되었다. 메로드 웨스테르는 탈라르의 군대가 벌인 이 전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프랑스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이유로 인해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하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너무 낙관적이다는 점이고, 다른 점은 그들의 불완전한 전투 배치였으며, 여기에 더하여 군대의 무질서함과 경험 없는 배치가 있었다. 이 모든 과실들이 이 유명한 전투에서의 패배를 불러왔다."
그러나 외젠 공작은 프랑스군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적어도 4번 돌격하지 않은 기병대대와 보병대대를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넘 전투는 아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였을 것이다. 멋진 협력을 보여준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작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도움으로써 대동맹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뮌헨(Munich),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잉골슈테트(Ingolstadt), 울름(Ulm)과 같은 그때까지 남아있던 바이에른의 영토들이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일버쉐임 조약(Treaty of Ilbersheim)이 1704년 11월 7일 서명되었는데,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의 군사 지배에 놓이게 되고 남은 전투 동안 합스부르크에 편의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바이에른 선제후와 마르생 원수의 양익의 잔여병력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퇴각했고 궤주하는 동안 7,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비록 바이에른의 지배자로 남아있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비록 동맹국 오스트리아의 엄격한 간섭이 있긴 하겠지만.) 그는 자신이 아직 군사권을 쥐고 있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동맹에 대한 전투를 계속하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떠났다. 프랑스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탈라르 원수는 부하들과는 다르게 석방되거나 교환되지 않았고 잉글랜드로 보내져서 노팅엄(Nottingham)에 갇혔다가 1711년에야 풀려났다.
1704년의 전역은 동맹군이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평소보다 오래 진행되었다. 프랑스는 너무 강력해서 단 한번의 승리로 평화를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자, 외젠 공작, 말버러 공작, 그리고 바덴의 루이공은 그들의 다음 움직임을 협의하기 위해 만났다. 다음해에 말버러 공작은 라인과 모젤(Moselle)강을 따라 프랑스 깊이 들어가는 전역을 제안했다. 이 요구는 라인을 지키는 란다우(Landau)요새와 모젤 강에 있는 트리에르(Trier)의 마을과 트라바체(Trarbach)를 점령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바덴의 루이공과 외젠 공작은 트리에르를 8월 26일에 함락했고, 란다우를 11월 23일에 함락했다. 그리고 트라바체를 12월 20일에 함락하면서 1704년의 전역은 끝을 고했다.
말버러 공작은 앤 여왕(Anne)의 환호와 함께 12월 14일(옛 스타일과 새로운 스타일 닐짜) 그의 고향 영국으로 돌아갔다. 1월의 1일, 블레넘 전투에서 획득한 110개의 기병대 깃발과 128개의 보병연대 깃발이 웨스트민스터 홀까지 행진했다. 그러나 그 이상 가지는 않았다. 1705년 2월, 이미 3년 전 존 처칠을 말버러 공작 작위를 수여한 앤 여왕은 그에게 왕실 소유의 우드스톡 공원을 하사하였다. 또한 이곳에 그의 영광된 승리를 기념할 만한 적절한 건물을 짓는 데 240,000 파운드를 지급할 것을 약속하였다.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크리시(Edward Creasy)는 이 승리를 역사상 결정적인 승리 중 하나로 평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 블레넘이 없었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했던 그 넓이와 비교할 만하고, 그 견고함에서 로마와 비슷한 프랑스의 침략 영향으로부터 전 유럽이 고통받았을 것이다.."
오늘날 블레넘 궁전(Blenheim Palace)은 왕실에 속해있지 않은 건물 중 유일하게 궁전(Palace)라 칭해지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여전히 말버러 공작가의 거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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