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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 대외의 전쟁 본문

역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 대외의 전쟁

rheinland 2025. 2. 23. 10:00



18세기의 함대 상상도


유럽 외부의 전쟁


전쟁은 북미와 인도에서도 벌어졌다. 북 아메리카에서의 전쟁은 ‘조지 왕 전쟁’이라고 불린다. 이 전쟁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은 메인(오늘날 메사츄세츠의 일부)의 윌리엄 페퍼럴이 지휘하는 영국군이 1745년 4월 29일에서 7월 16일 동안 전투를 벌여 케이프브레턴섬에 있는 프랑스의 루이스버그 요새를 함락시킨 것이다. 루이스버그는 이후 거의 사략선의 보금자리가 되었으나 평화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에게 양도 되었으며 이는 영국 식민지 주민들의 분노를 야기하였다. 인도에서는 1746년에서 1748년에 걸쳐 제1차 카르나티크 전쟁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졌는데, 이 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다.

전쟁의 전반적 성격


프로이센군은 보편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식되긴 하였기만 사용되거나 의무화되지 않은 전술원리와 훈련 원리를 적극적으로 응용하는 방법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다른 강대국들은 전쟁 후에 프로이센의 군제보다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군제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식으로 군제개혁을 단행한다. 게다가 프로이센은 군대 통솔측면에서 다른 유럽의 국가들, 그 중에서도 특히 오스트리아에 비해서 결정적일 정도로 앞서나가고 있었다. 덧붙여 프리드리히의 개인적인 통솔능력은 개개의 장군들의 지휘력보다는 국왕 자신에게 더 충실하도록 하였다.

당대의 다른 전쟁들처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작전의 목적과 그 수행 방법이 서로 동떨어져 있다. 프랑스와 다른 동맹군들이 수행한 작전은 근대의 군사작전들이 그렇듯 웅장한 것이었다. 당시의 시간적, 공간적 상황에 따라 이 작전들은 전쟁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작전을 기획한 당사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이는 ‘7년 전쟁’에서도 드러난다. 18세기의 소규모 상비군은 단계적으로 타국을 점령할 수 있었으나, 치명타를 가하지는 못하였다. 프리드리히만이 유일하게 분명하게 목표를 성취하고 균형 잡힌 방법을 통해 작전을 성취하여 성공적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이후에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은 극히 적었고 이를 두고 파리 사람들은 ‘평화에 따른 바보짓’(Bête comme la paix)이라고 칭하였다.

동맹군을 보낼 때는 비록 그다지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더라도 전쟁에 따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부대를 파견하였다. 1813년에 구성된 동맹군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협력하였다. 1741년에 구성된 동맹군은 여러 왕조의 다양한 목표들을 동시에 수행하려 하였으며, 결국 단 하나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해상작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해상 작전은 활발하지 못했고, 또 혼란스러웠다. 양측의 함대는 사실상 1739년 영국과 스페인 사이의 아메리카 영유권 문제로 촉발된 젱킨스의 귀 전쟁(War of Jenkins' Ear)으로 인하여 교전을 시작하였다. 전쟁이 막을 내릴 때까지 양측 함대는 별다른 현명한 작전을 펼치지도 않았고 열정을 보이지도 않았다. 스페인 정부는 무기력했고, 자신의 아들을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만들고 싶어 했던 스페인의 펠리페 5세의 개인적인 야망으로 인해 실질적인 이익을 놓쳐버렸다. 프랑스의 행정당국 역시 부패해있는 상황이었으며, 정부는 해상보다는 독일에서의 정치적 이권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영국함대는 로버트 월폴 경이 담당한 이후 상당히 움직임이 둔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전쟁의 활기를 불러일으킨 적은 있었지만, 해상에서는 어떤 치열한 이권다툼도, 결정적인 전투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전쟁은 양측 사략선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서인도제도에서 스페인이 행한 사략선의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스페인 함대는 본국에서도 큰 활약을 펼쳤다. 프랑스군은 전 해역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마에 드 라 부르도네가 마드라스에 참여한 것은 사략 함대의 활동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도 이에 활발하게 대응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해적선에 의하여 나포된 총 함선 수는 영국의 목록에 나온 것보다 많다.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들은 호언장담을 기록했는데 그 내용인즉, "더 많은 영국 상선을 나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영국 상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프랑스의 우세는 영국 정부가 이후에 그런 것처럼 수송선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진하는 사략함대 상상도


세계전쟁


1739년 영국은 스페인에게 전쟁을 선포하였고 이로 인하여 젱킨스의 귀 전쟁이 발발하였다. 스페인의 식민지들이 공격당하기 전에 붕괴될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영국군의 계획은 동과 서에서 스페인 식민지에 대하여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육군과 해군으로 구성된 일군은 에드워드 버논 제독의 지휘 하에 서인도제도로부터 공격을 실시하였다. 후에 앤슨 경이 되는 조지 앤슨 제독 휘하의 다른 군세는 혼곶 근교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태평양쪽 해안을 습격했다. 작전의 지연, 열악한 환경, 조선소 내부에 만연한 부패, 육군과 해군 지휘관들의 비애국적이고 집단이기주의적인 다툼으로 인하여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739년 11월 21일 버논 제독은 사실상 별다른 방비태세를 갖추지 않은 포르토 벨로(오늘날의 파나마 공화국)의 스페인 항만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 별로 중요할 것 없는 승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버논 제독은 스페인의 보급함대가 유럽에 도달하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스페인 사략선은 서인도 제도와 유럽 사이의 영국 무역선에 약탈을 감행하여 파멸적이라 칭할 만한 타격을 입혔다. 버논 제독이 챌로너 오글이 이끄는 수상 지원군과 합류하자 오늘날 콜롬비아에 있는 카르타헤나에 공격을 가하려 하였다.(1741년 3월 9일 4월 24일) 그러나 작전이 지연됨에 따라 스페인 제독 돈 블라스 데 레소 제독에게 방비할 기회를 주었다. 결국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공격한 영국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영국군의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육군의 도움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은 거의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에 반해 스페인 방어 군은 지휘를 일원화하여 영국군을 격퇴하였다.

서인도 제도에서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이후에도 스페인 영토에 대한 공격이 2번 정도 이루어졌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고, 서서히 교착상태에 빠지더니 이 상태로 1748년까지 계속되었다. 앤슨 제독은 보급 상태가 최악인 상태로 항해를 계속했고 작전에 필요한 전력에 비해 너무 적은 전력을 가지고 전투에 임하였다. 앤슨 제독의 함대는 6척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은 1740년 9월 18일 출항하였다. 앤슨은 1744년7월 15일 기함 센츄리언 한 척만을 이끌고 귀환하였다. 나머지 함대는 혼곶에서 함대에서 이탈하거나 상실하였다. 그러나 앤슨은 칠레와 페루 해안으로 이동하여 필리핀 근처에서 막대한 물자를 실은 스페인 갈레온을 나포하였다. 그의 항해는 결의와 지구력에 의해 이루어진 위업이었다.

지중해


앤슨이 세계 일주를 하고 있는 동안 스페인은 주로 이탈리아의 왕위와 관련된 정치적인 이해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카디스에서 출발한 보급 함대가 이탈리아로 출발하였다. 이 함대는 영국제독 니콜라스 하독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봉쇄된 스페인 함대는 보급의 필요성으로 인해 결국 항구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스페인 제독 돈 후안 호세 나바로는 바다로 나아갔다. 영국 함대가 이를 따라잡았을 때 나바로 함대는 드 쿠르의 프랑스 함대와 1741년 11월 합류하였다. 프랑스 제독은 만약 스페인 함대가 공격당할 경우 지원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해덕의 함대는 퇴각하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아직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독일에서 영국은 헝가리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맹자로서,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바바리아 선제후의 지지자로서 독일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바로와 드 쿠르는 툴롱으로 이동하였는데 여기서 1744년 1월까지 머물러 있었다. 리처드 레스토크 제독 휘하의 영국 함대는 이들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토머스 매슈스 경은 해군 총사령관이자 토리노의 장관으로서 파견되었다.

북 대서양


프랑스와 영국간의 부분적인 적대선언은 이외의 해역에서도 벌어졌다. 그러나 공식적인 전쟁선언은 5월 30일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영국 정부가 5월 31일 이에 대응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은 잉글랜드 공략을 준비하였고 이와 동시에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와 매튜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함대 사이에 툴롱 전투가 지중해에서 벌어졌다. 1월 11일 영국 함대의 선봉과 중위가 동맹군의 후위와 중위와 교전을 벌였다. 레스토크는 그의 상급자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레스토크는 자신이 매튜의 명령에 반대하였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혼란상태에 처한 데다가 성질이 급한 매튜 제독은 열정적이나 무질서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에 따라 영국함대는 전열이 붕괴되어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영국함대는 전투에서 자신의 실력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영국인들은 분노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함대 개혁에 전력을 다했다.

프랑스의 영국 공략은 재커바이트 지도자들과 병사들을 됭케르트에 상륙시킴과 동시에 진행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를 완벽하게 꿰뚫어보고 있었고, 계획은 완벽히 분쇄되었다. 1744년 1월 20척의 드 로케푀이 휘하의 프랑스 전열함대는, 존 노리스 제독 휘하 영국함대가 대응준비를 하기도 전에 영국 해협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의 장비는 열악했고 제독 역시 안 좋은 기상여건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불운한 사건들에 대하여 염려하느라 긴장하고 있었다. 드 로케푀이는 다운스 지역까지 진입하였으나 이곳에 존 노리스가 지휘하는 25척의 전열함대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퇴각해 버렸다.

비록 당시 네덜란드가 플랑드르 지방을 보호하기 위하여 해상활동이 위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드 로케푀이 제독이 퇴각함에 따라 로케푀이 함대의 호위 속에 영국으로 건너가고자 했던 됭케르트 방면 프랑스 군의 움직임은 자연스레 연기되었다. 아직 치명적인 공격을 당하지 않았고 본국과 독일에서의 이권이 훨씬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국정부는 해상에서의 활동을 강화하는 데 주저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영국 함대는 별다른 공세적인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1745년 동안 뉴잉글랜드에서 루이스버그를 공략하였고 이에 영국 함대의 지원이 뒤따랐으나 작전은 산발적이었고 보급 작전에 뒤따른 움직임일 뿐이었으며,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동인도에서는 마에 드 라 부르도네가 영국 함대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는 소규모 함대를 이용하여 맹활약하였다. 부르도네는 마드라스를 1746년 7월 24일에서 9월 9일 동안 공략하여 함락시켰고, 루이스버그를 향하여 출항하였다. 루이스버그와 마드라스는 종전협정에 따라 교환되었다. 같은 해 영국 연합 함대는 프랑스 해안에 상륙작전을 펼쳤으나 이러한 일련의 작전들은 "기니 동전으로 창문 깨기"라는 조롱을 받았다. 이들 작전은 8월과 10월경에 행해졌다. 이들의 목적은 로리앙에 있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조선소를 파괴하는 것이었으나 실패하였다.

1747년부터 전쟁이 끝나는 1748년 10월까지 영국정부의 해군정책은 최고조에 달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열정적이고 일관된 움직임을 보였다. 프랑스 해안에 근접하여 정찰을 보내고 있었고, 프랑스와 프랑스의 미국 식민지의 연결을 단절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작전들을 수행하였다. 봄에 로리앙으로부터 동부와 서부 인도를 향하여 중요한 수송선이 출발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전해에 영국 정부는 비록 자신들의 약점으로 인해 스스로 붕괴해버리긴 했지만 당빌 공작 휘하 프랑스군의 상륙을 허용한 적이 있었다. 1747년에는 좀 더 명예로운 작전을 성공시켰다. 앤슨 제독 휘하의 영국 함대가 해협에서 수송선을 습격했고, 이를 격침시키거나 나포하고, 격퇴하였다. 이 전투는 5월 3일 벌어졌으며 ‘제1차 피니스테레 곶 해전’이라 명명되었다.

10월 14일 막강한 함대에 의해 보호되던 프랑스 수송선이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나 더 우위에 있는 영국 함대에 의해 비스케이만에서 습격당했다. 이 전투를 제2차 피니스테레 곶 해전이라고 하는데 프랑스의 제독 데셀비에 드 레탕뒤에르는 훌륭하게 방어를 지휘하였고, 뛰어난 에탕뒤에르의 전함들은 에드워드 호크 경 휘하의 훨씬 많은 수의 영국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비록 프랑스군은 해전에서 패하였지만, 함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 수송선들은 에탕뒤에르가 호위용으로 파견한 소규모의 함대의 보호 하에 서부 인도로 계속 항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다른 해역에서 영국함대에게 공격당하거나 나포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해상에서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 이상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마지막 해상 작전이 벌어진 곳은 서인도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스페인 함대가 찰스 놀스 제독 휘하의 영국 함대에게 쿠바 해안에서 습격당한 사건이다. 이들 중에는 아바나에 배치된 레기오 제독 휘하의 해군이 소속되어 있었다. 양측은 자신들의 상선들을 지키고 상대측의 상선을 약탈하는 데 고심하고 있었다. 영국함대는 아메리카의 광산에서 채굴한 금괴와 은괴를 싣고 본국으로 귀환하는 스페인 함대를 약탈하려 하였다. 이 영국함대는 영국 수송선을 보호하던 역학을 맡던 함대와 1748년 10월 1일 합류하였다. 이 작전은 후의 영국 함대가 거둔 성공에 비교하면 결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확실히 찰스 놀스 제독이 우세하게 전황을 이끌었다. 그는 찰스 놀스는 이 와중에 격심한 전쟁으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진이 다 빠져버린 유럽 열강이 평화 조약을 맺었다는 정보에 따라 작전을 중지하였다. 서로의 전후 복구 과정을 보면 그 어느 쪽도 전쟁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벵갈 만 점령과 플랑드르에서의 군사적 성공을 거둔 프랑스는 이 둘을 대등한 성과로 다루었으며, 스페인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War_of_the_Austrian_Succession